자유게시판
케인스가 경멸한 세습자본주의
조 영 철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경제학자다. 케인스는 한때 세계 경제를 조율하는 헤게모니 국가였던 영국이 급속히 쇠락하던 시대에 살았다. 케인스는 영국의 몰락을 막기 위해서 다양한 처방을 제시했지만 결국 침몰하는 대영제국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불황 시기의 높은 실업률은 실업자가 게으르고 터무니없이 높은 임금을 고집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효수요 부족 때문이란 케인스의 설명은 유명하다. 케인스는 금리를 내리고 정부 지출을 늘리는 총수요 확대 정책으로 1930년대 영국 경제가 당면한 대공황과 실업이라는 급한 불을 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영국 경제가 쇠퇴하는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다른 데 있다고 보았다.
세습 기업주의 영국은 침체, 혁신 창업주의 미국은 성장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세계 최초의 산업국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되면 영국 자본주의는 혁신 기업가가 아니라 경영권 세습이 지배하는 나라, 타성과 기득권에 안주하는 수구 보수주의의 나라가 돼버린다.
반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은 창업 기업가들에 의한 엄청난 혁신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지고, 밴더빌트의 철도회사, 카네기의 U.S. 스틸,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포드자동차 등 현대적인 거대 기업들이 속속 등장한다. 당시 영국의 대기업이라고 해봐야 수백 명에서 수천 명 규모의 고만고만한 기업이었던 반면, 미국의 대기업은 영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였다. 당시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 수가 6만 명 수준이었을 때, 펜실베니아 철도회사는 2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적인 인사관리는 미국 철도회사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자동차 회사의 경우 공장제수공업(manufacture) 방식으로 숙련노동자들이 달라붙어 자동차를 만들 때, 포드자동차는 컨베이어 시스템(conveyer system)의 대량생산 방식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다. 산업혁명으로 성공한 영국이 고리타분한 세습자본주의 국가로 정체되어 있을 때, 후발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혁신적인 창업기업가들에 의해서 현대적 법인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영국의 경영권 세습 기업인들에 대한 케인스의 인상은 아둔하고 게으르다는 거였다. 케인스는 정력과 상상력을 가진 혁신기업가가 기업을 창업하면, 그 아들은 경영권을 이어받아 손쉽게 적당히 경영하다가, 손자에 이르러 파산한다는, ‘3세대 세습경영 주기 이론’을 확고하게 믿었고, 더 나아가 기업 차원을 넘어서 자본주의경제가 파탄에 빠지는 원인도 세습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케인스가 유동성과 단기 수익성만을 추구해 산업발전을 저해한다면서 지주계급처럼 금리소득자(rentiers)도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상속과 세습에 기초한 영국 금융자산계급을 경멸한 은유(metaphor)였다. 케인스는 영국을 망치는 것이 엘리트주의 자체가 아니라 세습에 기반하고 있는 ‘아둔한’ 엘리트주의라고 보았다.
이처럼 능력과 관계없이 창업자의 아들, 손자라는 이유로 경영권을 세습하는 관행이 고착화되면서, 영국은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창의적인 사회 혁신기제가 무너졌고 결국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사학자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영국이 유럽국가 중 가장 먼저 절대왕정의 재량권 침해를 받지 않는 사유재산권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영국의 선진적 사유재산권 제도가 산업혁명 시대에는 혁신의 기반이었지만, 세습자본주의 시대에는 혁신을 가로막는 수구세력의 기반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능력 아닌 세습이 지배할 때, 경제 침체 당연
1960~70년대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핵심은 이병철, 정주영 같은 창업기업가가 한국경제를 휘젓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아니라 세습주의가 지배하는 한국경제가 침체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현재 우리나라 100대 부자 대부분은 재벌 2세, 3세들이다. 최근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이들이 성공한 분야는 게임산업, 화장품, 네이버, 다음카카오, 쿠팡 등 대부분 재벌기업과 거래를 할 필요 없이 시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거래하는 B2C(Business to Consumer) 분야다. 한국에서 B2B(Business to Business) 분야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오라클과 같은 창업대기업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재벌기업의 독과점과 단가 후려치기, 일감 몰아주기, 기술 탈취 등의 횡포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경제에서는 B2B 분야가 B2C 분야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B2B 분야에서 벤처기업 신화가 나오지 못한다면 한국경제 발전은 한계가 뚜렷하다.
한국은 지금 케인스 시대의 영국과 너무나 흡사하다. 화웨이, 알리바바, BYD 등 창업기업가가 주도하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한국경제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는 세습자본주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 전 국회의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재벌 2세, 3세들이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는 ‘아둔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서 한국경제의 혁신을 기대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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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영철
·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 전 국회예산정책처 사업평가국장
· 저서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후마니타스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당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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